도처에 썸 투성이다

최근에 내 주변에는 썸을 타는 사람들이 제법 여럿이다. 여자도 있고 남자도 있는데, 그들 모두 저마다의 썸에 대해 얘기를 하는걸 듣노라면, 아아 역시 연애란 썸탈때 가장 아름다운 것이로구나 싶다. 썸 타는 동안은 초조하거나 고통일지도 모르지만, 돌아보면 그 시기가 가장 아름다울 것이니.

며칠전에는 헬쓰장에 가서 런닝 머신위에서 걷는데, 옆의 런닝머신 위에는 썸을 타는 듯한 남녀가 있었다. 여자는 운동을 막 시작한 단계고 남자는 그 여자에게 운동을 알려주는 트레이너였는데, 이들은 트레이너대 고객으로 만난게 아니라 이미 어딘가에서 아는 사이인데 네가 나의 트레이너가 되어주련? 한 관계인걸로 보인다. 공교롭게도 바로 옆자리의 나는 그들의 대화를 너무나 또렷이 다 들을 수 있었는데, 그런 대화들 틈틈이 오호라, 썸타는구나, 싶었던거다. 그러니까 남자쪽을 향해 나는, 중간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된거다.

너 이노므자식, 그렇게 해놓고 만약 여자가 고백했는데 ‘미안해 난 그런 감정이 아니었어’ 라고 하면, 넌 진짜 개새끼다.

 

남자는 여자를 누나라고 불렀고 존대를 했다. 예를 들자면, 누나 오늘 물 얼마나 마셨어요? 밤에 잠은 잘 자요? 여자는 남자에게 반말을 했는데, 아침엔 커피 많이 마셔 물은 안마셔 커피로 마셔도 돼? 추측하건데 교회에서 만난 게 아닐까 싶은데, 뭐 이건 어디까지나 대화를 듣다가 내가 추측한거고, 여튼 트레이너인지라 적당히 몸 좋은 남자가 여자에게 존대하며 속살거리는 게 퍽 다정하게 느껴졌다. 옆에서 자꾸 내가 다 피식피식 웃음이 났달까. 그러면서 은근 썸이 부러웠던걸지도 모르겠다. 그날 밤에 집에 돌아와 자다가 꿈을 꾸었으니.

 

꿈에 나는 맙소사, 보쓰 아들의 과외선생이었다. 그것두 무려 수학 과외선생! 보쓰의 아들은 인문계 출신이라 문과대학에서 공부중이었는데, 집에서 반드시 가업인 병원을 이어가야 하므로 수학과 과학 공부를 시작했던 것. 나는 그의 수학을 봐주었던 거다. 꿈속에서도 봐주면서 그가 풀어내는 걸 이해 못해서 저게 뭐냐…하면서 보고 있는데 마침 우리가 공부하던 중에 보쓰가 들어와 내 아들이 공부를 잘하느냐, 내게 물었다. 나는 네 신기해요, 수학 문제 되게 잘 풀어요, 라는 과외선생답지 않은 답을 했고 이 말에 보쓰는 만족하며 자리를 떠났다. 보쓰가 나가자마자 그의 아들은 내게 수학 공부 하기 싫다고, 의사가 되고 싶지 않다고, 가업을 잇고 싶지 않다고 토로했다. 그와 나는 썸을 타는 사이었는데, 이것은 철저하게 비밀로 지켜져야 한다고 나는 꿈속에서 생각했다. 만약 내가 그와 썸타는 사이임이 드러난다면 과외고 뭐고 당장 때려쳐야 할거고, 나는 돈을 벌어야 하고, 그의 모든 가족들이 나와 그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뭐든 할거다, 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속으로 계속 나에게 말했다. 보쓰의 아들은 안돼, 썸타지마, 그러지마, 라고.

 

그리고 엊그제였나, 나를 포함한 여자 네 명이 술을 마시던 자리에서 썸 얘기가 나왔다. 나는 썸타는 시간이 제일 아름답고 행복하다고, 나는 썸만 타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다 애인이 되면 곧 질리고 지긋지긋해지지 않아? 다른 남자한테 눈돌아가고? 그러자 그 중의 두 명이 동시에 말했다. 자기들은 연애과정을 통틀어 썸타는 시간이 제일 싫다고. 그 뭣도 아닌, 확실치 않은 관계가 싫다고. 아니든 애인이 되든 뭔가 빨리 됐으면 좋겠다고. 끄덕끄덕, 나는 그들의 말을 이해했다.

댓글 남기기